반도체 아키텍처 6편 – 오픈인가 클로즈드인가? 빅테크가 주도하는 새로운 흐름, ‘수직 통합’

지난 5편에서는 반도체 산업의 변화를 ‘모듈형(조합형)’과 ‘통합형(조율형)’이라는 아키텍처 관점에서 살펴보았다. 린 콘웨이의 혁명이 산업을 IDM 중심의 통합형 구조에서 팹리스와 파운드리라는 모듈형 분업 구조로 변화시켰다면, 최근에는 미세 공정이 고도화되면서 분리되었던 설계와 제조가 다시 긴밀하게 연결되는 통합화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빅테크의 반도체 내재화 현상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시각이 더 필요하다. 이번 6편에서는 기존의 모듈형과 통합형이라는 제품 아키텍처에 더해서, ‘오픈(Open, 개방형)’과 ‘클로즈드(Closed, 폐쇄형)’라는 새로운 관점을 도입하여, 왜 최근 IT 기업들이 앞다투어 ‘수직 통합’을 선택하는지 그 구조적 원인을 분석해 보겠다.

I 아키텍처의 3가지 기본 타입

<그림 1> 아키텍처의 기본 타입

[그림 1: 아키텍처 기본 타입]은 일본의 경영학자 후지모토 다카히로 교수가 정립한 ‘아키텍처 매트릭스’이다. 우리는 앞서 가로축에 해당하는 ‘조립형(모듈)’과 ‘조율형(인테그럴)’의 차이에 대해 다룬 바 있다. 여기에 후지모토 교수는 ‘설계 규칙(인터페이스)을 누가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세로축을 추가하여 ‘오픈(Open)’과 ‘클로즈드(Closed)’로 구분했다. ‘오픈’은 설계도가 업계 표준으로 공개되어 누구나 부품을 만들 수 있는 상태를, ‘클로즈드’는 설계 규칙이 특정 기업 내부에만 닫혀 있어 외부에서는 알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참고로 좌측 하단의 ‘오픈 인테그럴’은 기본 설계가 내부에 닫혀 있어야 하므로 이론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아키텍처는 크게 오픈 모듈러, 클로즈드 모듈러, 클로즈드 인테그럴의 세 가지 기본 유형으로 나뉜다.

여기서 먼저 이해해야 할 점은 ‘모듈형(조립형)’이라고 해서 다 같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모듈형은 설계 규칙의 개방 여부에 따라 다시 ‘클로즈드 모듈형(Closed Modular)’과 ‘오픈 모듈형(Open Modular)’의 두 가지로 나뉜다.

<그림 2> 클로즈드 모듈형의 대표적 예시 : 레고

이 중 우측 상단의 ‘클로즈드 모듈형’은 과거의 IBM 360 메인프레임 컴퓨터나 레고(Lego) 블록이 대표적이다. 블록이나 부품이 모듈화되어 있어 자유롭게 조립할 수 있지만, 그 연결 규칙은 ‘기업 특수적인 사내 표준’에 따른다. 즉, 레고 블록끼리는 완벽하게 호환되지만 타사의 블록과는 맞지 않는 것처럼, 모듈의 편리함은 취하되 조합 가능성이 사내 공통 부품으로 한정되는 구조다.

반면, 우측 하단의 ‘오픈 모듈형(Open Modular)’은 설계 규칙이 업계 표준으로 완전히 개방된 상태를 말한다. 지난 30년간 IT 산업을 지배해 온 PC 시스템이나 다수의 개발자가 코드를 연결해 만든 리눅스(Linux), 그리고 인터넷 서비스 등이 모두 이 영역에 속한다. 이들은 표준 인터페이스를 통해 누구나 자유롭게 연결될 수 있어 ‘범용성’과 ‘가격 경쟁력’이 압도적이었으며, 1990년대 이후 등장한 대부분의 디지털 기기와 서비스가 이 방식을 통해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I 모바일·AI 시대, ‘범용 칩’의 한계와 ‘수직 통합’의 부상

<그림 3> 범용 칩 기반 ‘오픈’ 방식의 한계 봉착

그러나 모바일과 AI 시대가 도래하면서 판도가 바뀌기 시작했다. 스마트폰이나 웨어러블 기기처럼 전력 소모와 발열 제어가 극도로 중요한 분야에서는, 단순히 범용 부품을 조립하는 것(오픈 모듈)만으로는 경쟁력을 확보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초기에는 모바일 기기 역시 범용 칩(AP)을 사용하는 ‘오픈’ 방식을 취했으나, 곧 한계에 봉착했다. 누구나 구할 수 있는 범용 칩으로는 경쟁사 대비 차별화된 성능이나 배터리 효율을 만들어낼 수 없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선도적인 IT 플랫폼 기업들은 좌측 상단의 ‘클로즈드 인테그럴(Closed Integral)’ 전략으로 선회하기 시작했다. 이 유형은 고성능 자동차나 반도체 제조 장비처럼 기능 요구와 제약 조건이 매우 엄격한 제품에서 주로 나타난다. 즉, “핵심 경쟁력을 위해서는 부품 간의 미세한 조율(Tuning)이 필수적이며, 이를 위해 반도체를 직접 설계하고 통제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이는 단순히 부품 값을 아끼기 위함이 아니라, 소프트웨어의 요구사항을 하드웨어(칩) 단계에서부터 반영하여 최적의 성능을 끌어내기 위한 ‘수직 통합’ 전략의 일환이다.

이러한 변화를 가속화한 기술적 배경에는 설계 자산(IP) 비즈니스 모델의 혁신이 있었다. 영국의 Arm 등이 프로세서의 기본 설계도를 유연하게 제공하는 정책을 펼치면서, 비반도체 기업들도 막대한 시행착오 없이 자체 칩을 설계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덕분에 모바일에서 시작된 ‘자체 칩 설계’ 트렌드는 이제 태블릿, 노트북, 더 나아가 클라우드 서버 시장으로까지 확산되고 있다.

I 자체 칩 설계, 즉 ‘수직 통합’의 독보적 가치

<그림 4> ‘수직 통합’의 3대 전략적 이점

자체 칩 설계, 즉 ‘수직 통합’이 가져다주는 이점은 명확하다. 첫째는 ‘전력 대 성능비(전성비)의 극대화’다. 범용 칩은 불특정 다수의 기기에서 작동해야 하므로 보수적으로 설계될 수밖에 없다. 반면, 자체 설계 칩은 자사의 기기 특성과 발열 구조에 맞춰 트랜지스터 하나하나를 튜닝할 수 있다. CPU, GPU, NPU 등을 하나의 칩(SoC)으로 통합하고 불필요한 기능을 제거함으로써 경쟁사의 범용 칩 대비 압도적인 전력 효율을 달성할 수 있다.

둘째는 ‘기능의 커스터마이징(Customization)’이다. 최근 IT 기기의 경쟁력은 동영상 편집이나 AI 연산과 같은 특정 기능에서 판가름 난다. 수직 통합을 이룬 기업들은 이러한 특정 작업을 처리하는 가속기(Accelerator)나 미디어 엔진을 칩 내부에 직접 내장해 버린다. 소프트웨어만으로는 처리하기 버거운 무거운 작업들을 하드웨어 레벨에서 가볍게 처리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만들고 싶은 소프트웨어를 위해 하드웨어를 깎는다”는 수직 통합 전략의 핵심 가치다.

세 번째이자 가장 강력한 무기는 ‘플랫폼 간의 경계를 허무는 생태계 통합’이다. ‘수평 분업(오픈)’ 진영에서는 스마트폰(Arm)과 PC(x86)의 아키텍처가 다르고 운영체제 주체도 달라, 기기 간의 경험을 하나로 묶는 데 구조적인 한계가 있다. 반면, ‘수직 통합(클로즈드)’ 전략을 취하면 스마트폰부터 PC까지 동일한 아키텍처의 칩을 심을 수 있다. 이렇게 되면 개발자는 하나의 소프트웨어로 모든 기기에 대응할 수 있고, 사용자는 어떤 기기를 쓰든 끊김 없는 연속성을 경험하게 된다. 이는 경쟁사인 오픈 진영이 구조적으로 모방하기 힘든, 수직 통합 모델만이 가질 수 있는 강력한 ‘락인(Lock-in) 효과’다.

물론, 이러한 ‘클로즈드 인테그럴’ 방식이 모든 기업에게 정답인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막대한 비용과 리스크’라는 높은 진입 장벽이 존재한다. 자체 칩을 설계하기 위해서는 수천 명의 전문 엔지니어와 천문학적인 R&D 비용이 필요하며, 설계가 실패했을 때의 리스크 또한 온전히 기업이 떠안아야 한다. 따라서 현재의 수직 통합 트렌드는 막대한 자본력과 소프트웨어 생태계를 동시에 갖춘 소수의 ‘빅테크 기업’들이 주도하는, 그들만의 리그이자 생존 전략이라 할 수 있다.

I 고객의 니즈에 따라 움직이는 아키텍처의 진화

<그림 5> 애플 VS 안드로이드, 스마트폰의 2가지 아키텍처의 공존 구조

[그림 5]는 이러한 흐름 속에서 형성된 현재 IT 시장의 경쟁 구도를 보여준다. 왼쪽에는 칩 설계부터 OS, 단말기 제조까지 한 회사가 주도하는 ‘수직 통합형’ 진영이 있고, 오른쪽에는 OS, 칩, 제조사가 각자의 역할을 분담하는 ‘수평 분업형’ 진영이 있다. 과거 PC 시대에는 수평 분업이 시장을 평정했지만, 지금은 두 모델이 팽팽하게 ‘공존(Coexistence)’하고 있다. 수평 분업은 ‘비용 절감’과 ‘범용성’에 강점이 있고, 수직 통합은 ‘최적화’와 ‘차별화된 경험’에 강점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수직 통합’ 열풍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중요한 시사점은 따로 있다. 바로 “제품의 아키텍처는 고정된 정답이 아니라, 고객의 니즈에 따라 끊임없이 진화하는 생물”이라는 사실이다. 과거 PC 시대의 고객들은 ‘호환성’과 ‘저렴한 가격’을 원했기에 ‘오픈 모듈’이 정답이었다. 반면, 지금의 모바일·AI 시대 고객들은 가격이 조금 비싸더라도 ‘끊김 없는 연결성’과 ‘최적화된 성능’을 원하기에 ‘클로즈드 인테그럴’이 다시 주목받는 것이다. 결국 기업에게 필요한 것은 맹목적인 기술 통합이 아니라, 우리 고객은 지금 무엇을 원하는가?”를 파악하고 그에 맞춰 설계와 제조의 경계를 유연하게 허물거나 다시 세우는 아키텍처 전략 그 자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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