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반도체 산업의 설계와 제조 공정이 점점 더 복잡해지고 있다. 한때 반도체 발전의 방향을 설명하던 무어의 법칙—집적도가 24개월마다 두 배로 증가한다는 경험칙—은 더 이상 자연스럽게 이어지지 않고 있으며, 성능 향상 또한 예전만큼 단순하지 않다. 칩 하나에 담기는 기능은 훨씬 다양해졌고, 그만큼 부품 간의 관계와 동작 방식도 복잡하게 얽히고 있다.
I ‘아키텍처’ 사고로 바라보는 반도체
반도체가 사용되는 제품과 용도가 증가하면서, 단순히 반도체 하나의 성능을 올리는 것을 넘어 다양한 반도체를 설계할 수 있는 고도의 능력, 즉 전체 시스템을 어떻게 조직하고 구성할 것인가를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이 요구되고 있다. 가령 최근 주목을 받고 있는 HBM(고대역폭 메모리)은 메모리와 프로세서가 밀접하게 통합해서 설계한다. 반면, 칩렛은 기능별로 나뉜 모듈을 조합해 하나의 시스템(SoC)을 구성하는 방식이다. 즉 이 두 개 반도체의 두 방식은 단순히 구조가 다를 뿐 아니라, 설계에 대한 사고방식—즉 아키텍처 사상 자체가 서로 다르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반도체를 ‘아키텍처’라는 관점으로 재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 복잡한 기술적 요소들을 효과적으로 연결하고, 기능과 구조를 조화롭게 통합하려는 사고방식—그것이 바로 아키텍처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아키텍처(architecture)’라는 용어는 복잡한 시스템이나 구조를 설계하고 구성하는 방식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 현대 사회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원래는 ‘건축’, ‘건축학’을 의미하지만, 어원은 그리스어 ‘architekton’에서 나온 말로, 본래 의미는 ‘기술자 위의 기술자’, 즉 ‘슈퍼 엔지니어’라는 지위를 가리키는 말에서 유래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국가적 대사업이 있을 경우 분야별 최고 기술자를 ‘아키텍처’로 임명했다. 당시에는 토목·건축 사업이 빈번했기에, 이 표현은 자연스럽게 건축가를 지칭하는 말로 굳어졌다.
이 아키텍처라는 개념을 일반화하여 체계적으로 탐구한 인물이 바로 허버트 사이먼(Herbert A. Simon)*이다. 그는 논문 「The Architecture of Complexity」(1962년)과 저서 『The Sciences of the Artificial』(1969년)에서 아키텍처를 복잡한 인공물의 구조와 설계 원리를 이해하는 핵심 개념으로 제시했다.
* 허버트 사이먼(Herbert A. Simon, 1916–2001)은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 중 한 명으로, 경제학, 심리학, 컴퓨터 과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선구적인 업적을 남겼다. 인간의 의사결정이 완전히 합리적이지 않다는 ‘제한된 합리성(bounded rationality)’ 개념을 제시했으며, 인공지능 연구의 기반을 닦은 인물로 평가받는다.
I 시스템의 계층적 구조와 방향

그림2의 좌측은 인간의 몸과 내부 구성 요소를 계층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가장 아래에는 세포(셀)가 있으며, 세포는 조직을, 조직은 기관을, 기관은 기관계를 구성한다. 가장 작은 단위인 세포에서 시작해 점차 상위 구조로 통합되는 이 방식은 자연계 시스템의 일반적인 성장과 구성 방식을 보여준다. 이처럼 하위 요소의 집합이 상위 시스템을 이루는 상향식(bottom-up) 구조를 시스템 과학이라고 한다.
한편, 그림2의 우측은 정보 시스템의 설계 과정을 보여준다. 설계자의 의도에서 출발해 점차 구체화되고 실현되는 방향으로, 즉 상위 개념이 하위 요소로 분해되고 구현되는 하향식(top-down) 흐름을 따른다. 이 구조는 사이먼이 강조한 ‘설계된 인공물’의 전형적 특징으로, 시스템 공학에서 다루는 대표적 구조다.
결국 이 두 그림은 자연물과 인공물의 구조가 모두 계층 구조를 지니지만, 그 조직 원리와 생성 방향성은 정반대일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사이먼에게 중요한 것은 단순히 구조가 계층적이라는 점이 아니라, 그 구조가 어떻게 설계되었고, 어떤 의도를 반영하며, 어느 수준으로 어떤 기능을 담당하는지에 대한 분석이다.
사이먼은 복잡한 시스템도 결국 하위 시스템(subsystem) 들이 계층적으로 연결된 구조라고 보았다. 각각의 하위 시스템은 비교적 독립적이지만, 전체 안에서는 특정한 기능을 수행하며 상호 유기적으로 작동한다. 이를 통해 그는 복잡한 인공물은 분해가능성(decomposability)을 갖추고 있으며, 작은 단위로 나누어 설계하거나 분석할 수 있기 때문에 설계와 조직화가 가능하다고 설명한다. 예를 들어 건축물은 방, 복도, 구조체 등으로 나뉘고, 컴퓨터 프로그램은 모듈과 함수로 나뉘며, 기업 조직은 부서와 팀 단위로 구성된다.
사이먼은 또한 각 구성 요소가 독립적으로 보일지라도, 그 사이에는 상호작용과 제약이 존재하며, 전체 시스템의 성격은 단순한 요소의 집합 이상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복잡한 인공물의 핵심을 계층적 구조와 설계 전략에서 찾았으며, 이후 그의 이론은 1990년대 이후 제품 아키텍처 이론(product architecture)으로 발전해 현대 설계이론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여기서, 계층적 시스템(Hierarchic Systems) 은 여러 하위 시스템이 서로 연관되어 구성된 구조를 말한다. 이때 각 하위 시스템은 더 작은 단위로 나뉘며, 가장 아래 단계에 이르면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기본 단위에 도달하게 된다. 이러한 계층 구조는 자연계는 물론 인공 시스템에서도 보편적으로 널리 발견된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어디에서 분할을 멈추고, 어떤 단위를 ‘기본 시스템’으로 간주할 것인지 상황에 따라 임의적으로 정해지기도 한다. 따라서 복잡한 시스템을 어떻게 설계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이를 잘 보여주는 비유가 바로 두 시계공, 템푸스(Tempus) 와 호라(Hora)의 이야기다. (그림3 참조)
I 계층적 설계 방식에 따른 생산성의 차이

1천개의 부품으로 구성된 시계를 조립할 때에 템푸스는 모든 부품을 직접 하나하나 연결해 전체 시계를 완성했다. 작업 도중 전화가 와서 시계 조립을 놓다가 부서지는 경우 처음부터 새로 조립을 해야 했다. 하지만, 호라는 같은 시계를 만들면서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접근했다. 그는 전체 시계를 10개의 부품으로 구성된 작은 단위 모듈로 먼저 나누고, 이 모듈들을 다시 모아 더 큰 모듈을 만들었으며, 마지막에는 이 모듈들을 조립하여 전체 시계를 완성시키는 방식으로 일했다. 그래서 작업 도중 누가 말을 걸더라도, 그는 단지 중간 단계에서 멈췄을 뿐, 이전까지 완성된 부품은 그대로 유지되었기 때문에, 곧바로 작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이 단순한 방식 차이는 실질적으로 작업 시간, 생산성에 막대한 차이를 만들었다. 이 일화는 복잡한 시스템이 얼마나 효과적, 계층적으로 나뉘어 있는가에 따라 생산성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복잡성이 증가할수록 그 복잡함을 어떻게 나누고 연결할지를 판단하는 설계자의 사고가 시스템 전체의 성패를 좌우하게 된다.
I 맺음말
지금까지 우리는 허버트 사이먼이 제시한 아키텍처 개념을 살펴보았다. 사이먼은 복잡한 시스템을 이해하는 핵심이 그것의 계층적 구조와 설계 원리에 있다고 보았으며, 특히 인공물의 경우 자연물과 달리 명확한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하향식(top-down)으로 설계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사이먼의 이러한 통찰은 오늘날 반도체 산업이 직면한 복잡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틀을 제공한다. 무어의 법칙이 한계에 봉착하고, 단일 칩의 성능 향상만으로는 더 이상 충분하지 않은 상황에서, 반도체 설계는 점점 더 ‘아키텍처적 사고’를 요구하고 있다. HBM과 칩렛이라는 서로 다른 접근법은 단순히 기술적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복잡성을 어떻게 분해하고 재조직할 것인가라는 아키텍처 철학의 차이를 반영한다.
다음 편에서는 이러한 아키텍처적 관점을 반도체 노광기 산업에 적용해 보고자 한다. 반도체 제조의 핵심 장비인 노광기 분야에서 일어난 아키텍처의 변화가 어떻게 산업 전체의 판도를 뒤바꾸었는지, 그리고 기존의 지배적 기업들이 왜 새로운 아키텍처 혁신에 대응하지 못했는지를 살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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